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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하나님 앞에 소녀로 살았던

이형자 권사, 하나님 품에 안기다

‘횃불재단 故 이형자 명예원장 겸 이사장 천국환송예배’
횃불재단 카이캄 횃불트리니티 횃불회 고인 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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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기독교선교횃불재단 전 이사장 이형자 권사가 3월17일 80세를 일기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일평생 기도의 횃불을 들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였던 사역의 발자취만큼이나 수많은 신앙과 선교의 유산을 남기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3월19일 서울시 양재동 횃불선교센터 사랑성전에서는 ‘횃불재단 故 이형자 명예원장 겸 이사장 천국환송예배’가 드려졌다. 이 자리에는 기독교선교횃불재단과 사단법인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카이캄),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등 기관들은 물론 전국 횃불회 회원들이 함께해 그들의 마음에서 고인을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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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응답으로 하나님과 교제한 삶

이날 천국환송예배는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원로)의 집례로 송용필 목사(카이캄 연합회장)가 기도하고, 횃불사모합창단과 횃불트리니티 TSMS콰이어의 특송에 이어 김상복 목사가 요한계시록 14장13절을 본문으로 ‘복된 삶 복된 천국’ 제하의 설교말씀을 전했다.

김 목사는 이형자 권사의 삶과 업적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기도와 응답으로 하나님과 교제했던 순간들을 조명했다.

특히 횃불회의 처음 시작과 횃불선교센터를 건축하기까지의 이야기들, 믿음으로 63빌딩을 건축해낸 이야기, 한국교회 최초로 180개국 4500여명의 전세계 지도자들이 함께했던 GCOWE 세계선교대회, 해외 유학생들을 지원하여 150명의 세계적인 석학들을 길러낸 일,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까지 기적의 역사들의 산 증인으로서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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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교회 김상복 원로목사가 천국환송예배에서 설교말씀을 전하고 있다.

 

김 목사는 “우리는 천국환송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이형자 권사님은 이미 사흘 전에 천국에 도착하셨다. 이 땅에서의 모든 아픔을 내려놓고 환희를 누리며 하나님 앞에 찬양과 영광 돌리면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고 있을 줄 믿는다”고 말했다.


특히 김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성령님은 그렇다고 확증하시면서 ‘수고가 끝나고 이제부터 쉴 것’이라고 하신다”며 “평생 마음 속으로 기도해왔던 대로 80세까지 살다가 하늘로 가신 길을 감사함으로 환송하고, 잠시 후에 만날 날을 기다리며 기도하자”고 했다.

 


감사의 기억은 사랑의 고백으로

설교를 마치고 이어진 추모영상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사명에 충성했던 기록들을 담아내 예배를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감명을 전했다.

사모횃불회 증경회장인 오명숙 사모는 추모시로 고 이형자 권사의 뒷모습을 그리워했고,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오덕교 총장와 루디아횃불회 창립멤버 이정자 권사가 추모사로 고인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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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오덕교 총장이 추모사를 전하고 있다.

 

오덕교 총장은 이형자 권사를 남편에게 자상하고 좋은 아내로, 기도와 말씀의 사람으로, 고아와 과부의 어머니로, 세계선교의 비전을 품은 사람으로, 미래를 보고 인재를 양육한 영적 거장으로 기억했다.


특히 “이 권사님은 해외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을 듣고 기도했다. 선교에 기초한 신학을 올바르게 가르칠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횃불장학회를 설립했고, 해외 박사학위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매년 1인당 1만 불이 넘는 장학금을 지원했다. 이렇게 성장한 150명의 박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신학교육에 헌신하고 있다”면서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머지않아 권사님을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한다”고 연신 눈물을 훔쳤다.

이 권사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오랜 친구였던 이정자 권사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너무 많다. 이 권사는 하나님의 일이라면 예물 상자를 통째로 팔아서 기도회를 열었던 사람이다. 너무 약하고 여린 소녀가 어찌 이렇게 대단한 여인으로 변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붙들어주시니 이런 대단한 일을 해내는구나 생각했다. 내가 나이가 4살이나 위지만 많은 것을 이 원장에게 배웠다”며 “여자가 대우받지 못하던 시기에 부인의 말들 다 들어주고 믿고 응원해준 최순영 장로가 있었기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최 장로님의 수고와 노력도 모두가 기억해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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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자 권사의 남편 최순영 장로가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모든 순서의 끝에 힘겹게 마이크를 잡은 최순영 장로는 먼저 떠난 이 권사를 생각하며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최 장로는 “나와 이형자 권사가 마지막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남아있다. 그 일 때문에 이형자 권사가 하나님께 그 일을 이뤄달라고 말씀드리러 빨리 간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밖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너무 가슴이 먹먹해서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드릴 수가 없다. 죄송하고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갈무리했다.

이날 천국환송예배는 횃불장학생 1호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원로)가 축도함으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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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열심

이형자 권사는 1944년 이병길 교수와 고정엽 여사의 장녀로 출생해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났다. 탁월한 수묵화의 소질을 발견하고 프랑스 유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다.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학과를 졸업할 즈음에 최순영 장로를 만나게 하셨고, 한남동 작은 집에서 오늘날 횃불회의 뿌리가 된 ‘루디아 횃불회’를 시작하게 하셨다.

기도의 횃불을 보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한 곳에 수용할 수 없어 횃불의 불씨가 퍼뜨려지기 시작했고, 1979년 사단법인 한국기독교선교원을 등록하면서 한국횃불선교회관을 개관했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가지마다 횃불에 불을 붙이라’는 비전을 보여주셨고, 횃불회 모임은 전국으로 번져나가 한국교회를 밝히는 기도의 횃불로 오늘도 타오르고 있다. 횃불회 사역은 1991년 완공된 횃불선교센터를 중심으로 더욱 탄력을 받았다.

이와 함께 이형자 권사는 1996년 학교법인 횃불학원 초대이사장으로 섬기며 교육선교의 새로운 부르심에 응답했고, 1997년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가 인가를 받으면서 세계복음화를 향한 신학교육기관을 세우게 된다.

당시 사단법인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가 함께 출발하면서 이사장을 맡았고, 독립교회가 한국교회에 자리잡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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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한민족디아스포라 세계선교대회 장면.

 

2008년 무릎의 기도 가운데 ‘네 민족을 사랑하고 네 동족을 아끼라’는 세미한 음성을 들은 이 권사는 디아스포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2011년 ‘횃불 한민족 디아스포라 세계선교대회’를 시작했다.


뿐만아니라 오랫동안 횃불재단을 섬겨오면서 국내외 크리스천 리더들을 지원하고 세우는 사역에 주력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측면에서 끊임없이 도왔다.

이 권사는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미시시피대학교 명예선교학박사,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교 명예문학박사, 전주대학교 명예문학박사를 수여받았다.

유족으로는 최순영 할렐루야교회 원로장로와의 사이에 장남 지욱(전 신동아화재 이사), 차남 지열(기독교선교횃불재단 이사장), 장녀 지선(횃불학원 이사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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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래 기자

출처 : 컵뉴스(http://www.cupnews.kr)

기사 링크 : https://www.cup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23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