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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교 칼럼] 제1장 초대교회 설교자와 설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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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교 총장 /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3. 교부들과 오리게네스의 설교

거침없이 전개되던 설교 운동은 로마제국의 박해로 인하여 시련을 겪기 시작하였다. 로마제국의 박해는 정치적 · 종교적 이유도 있었지만, 사회적 요인으로 인한 것이 더 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상이 비기독교인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음란하고, 비윤리적인 삶을 추구하던 로마인들과는 달리, 기독교인들은 정결한 삶, 도덕성, 자유와 평등사상을 추구하며 살았다. 계급 사회구조를 가졌던 로마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만민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신격화 또는 우상화를 거부하였다. 검투사 경기 등 잔인한 살상을 즐기던 로마인과 달리, 그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교훈에 따라 인간의 생명을 중시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살상을 즐기던 극장 문화를 거부했고, 쾌락과 음란을 멀리하였고,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높은 윤리적 가치관은 우상 중심의 로마인들에게 무언의 압력이 되었고, 이러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하여 여기저기서 박해가 이어졌다.

기독교인이 박해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황제 숭배에 대한 거부였다. 로마 황제들은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하여 스스로 신격화하고, 백성들에게 자신을 신처럼 섬길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늘 위와 땅 아래에 계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6)가 자신을 신이라 칭하면서 모든 백성은 자신의 형상 앞에 나와 절해야 한다고 명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한결같이 거부하였다. 황제를 신처럼 숭배하는 것은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보다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트라야누스(Trajanus, 98~117) 하드리아누스(Hadrianus, 117~138),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137~161)와 같은 로마 황제에 의한 박해가 이어졌고, 로마 황제 중 ‘현인’이라고 불리던 마커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도 기독교 박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기독교인들이 사랑을 내세우자, 로마인들은 그들이 인육을 먹는 자들이라고 조롱하기도 하였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내게 상관이 없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요 6:25)때문에 기독교인이 인육을 먹는 자라고 오해하여 박해하였다.

● 속사도와 설교

로마제국의 박해로 말미암아 교회는 좀 더 큰 시련 가운데 빠졌다. 공개적으로 모이거나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설교가 공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런데도 설교 운동은 은밀하게 이어졌고, 수많은 이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이처럼 조직적인 박해로 설교 운동은 금지되었고, 당시 교회를 지도하던 속(續)사도들의 설교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주후 70년부터 170년 사이에 활동하던 속사도들의 설교나 그들의 행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당시의 정부 공문서들을 통해서 그들의 흔적을 겨우 찾아낼 정도이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설교 운동은 이어졌고, 이러한 설교 운동으로 말미암아 2세기 중엽 복음은 지중해를 넘어 남유럽까지 전파되었다. 속사도 시대가 끝나고 2세기 후반부터 교부들을 통하여 설교 운동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c,150~216), 오리게네스(Origen, c 184~253), 이레 네우스(Irenaeus, 130~200),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6)와 같은 교부들에 의하여 설교의 횃불이 이어져 온 것이다. 교부들의 설교 내용은 성경보다는 당시 철학 사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 학자들은 교부들의 설교가 사도 시대보다 질이나 내용 면에서 뒤떨어진다는 평을 하고 있지만, 설교에 단순한 문제와 직접 화법을 사용한 점은 크게 발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예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예배의 핵심 요소이던 설교가 회중 대표에 의한 성경 낭독으로 대체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풍습은 박해가 약해지면서 사라졌고, 2세기에 이르면서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이 덧붙여지기 시작하였다. 교인 대표가 성경을 순서대로 읽은 후, 그것을 상황에 맞추어 해석하여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설교 방식은 「클레멘트의 제2 서신」(Second Epistle df Clement)에 처음 소개되었는데, 클레멘트는 즉흥적으로 주제를 택한 후, 적절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해석함으로 설교하였다.

교부 시대에 이르면서 즉흥적인 설교들은 점차 사라졌다. 즉흥 설교는 성경에 능통한 설교자에게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 교회에 큰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가 주관적인 내용으로 채워지기도 하였고, 그 결과 이단이 등장할 가능성을 열었다. 이러한 연유로 성경 본문을 묵상한 후 그것을 강해하려는 시도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이끈 대표적인 이가 ‘강해 설교의 아버지(the father of expository preching)’라고 불리는 아프리카의 설교자 오리게네스(Origen, c 184~253)였다. <계속>

출처 : 컵뉴스(http://www.cupnews.kr)

링크 : https://www.cup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25571